"후우.."
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에 온 것은 좋았지만 마치 모든 시선들이 자신에게 쏠리는듯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에 숨어든 상태였다.
괜찮아진줄 알았는데 최민지가 저지른 만행은 여전히 지혜를 괴롭히고 있었다. 집 밖에 나올때까지는 괜찮았지만 점점 대학이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힘들 지경이였다.
'씨발.. 씨발!'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며 지혜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녀가 원하는 복수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일단 대학에 온 것 까진 좋은데.. 이제 뭘 해야하지?'
민경에게 직접 영향을 주기 위해 대학을 오긴 했다만 사실 거의 무계획에 가까웠다.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심리마저 이렇게 불안정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아아..."
결국 허탕이였다. 다시 모자와 마스크를 낀 지혜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밖으로 나와 손을 씻었다.
'일단 불러볼까?'
지혜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경아 지금 뭐해?'
'나? 지금 실습 중~ 곧 끝날거같아 왜?'
'나 대학 왔는데 잠깐 볼래?'
'어 지금? 그래 끝나면 연락할게~'
약속은 잡았으니 이제 행동할 일만 남았다. 지혜는 일단 카페를 가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나는게 이런 것 밖에 없는걸'
가장 쉽고 편하게 민경에게 곤혹을 안겨주는 방법, 이런 일에 익숙치 않은 지혜가 당장 생각나는거라곤 커피에 무언가를 타는 1차원적인 방법 뿐이였다.
'그러고보니 제로 아샷추가 설사를 그렇게 일으킨다던데..'
아이스티에 샷 추가해서 마시는 음료를 민경이 몇번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걸 이용해보기로 했다.
"이걸 여기다 섞으면.."
밖으로 나와 근처 벤치에 앉은 지혜는 카페에서 산 아이스티에 샷추가한 음료에 편의점에서 사온 푸룬주스를 섞기 시작했다. 처음엔 색으로 티가 날까 걱정됐지만 나름 괜찮게 섞였다.
"좋아 먹이기만 하면 성공이야"
솔직히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음료 제작을 마친 지혜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마침 민경으로부터 끝났다는 연락이 와있었다.
'금방 갈게'
민경은 휴게실에 있다고 했다. 자신이 마실 음료와 민경에게 먹일 음료를 챙긴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지혜..맞지?"
"윽?! 서, 선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성실여대 3학년 지유나는 어쩐지 낯이 익은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 목소리에 당황한 지혜는 실수로 대답해버렸다.
'모른척하고 갔어야했는데!'
"지혜구나! 진짜 오랜만이야 괜찮은거야?"
유나는 봉사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였다. 민경이 아는 언니가 봉사 동아리에 있다는 이유로 지혜까지 강제로 끌고와 입부시켰고 그곳에서 안면을 틀었다.
"아..네"
솔직히 말하면 지혜가 껄끄러워하는 타입이였다. 긴 갈색 생머리와 눈웃음이 예쁜 외모를 가진 유나는 대학 내에서 민지나 민경 못지않게 예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사람이였다. 게다가 성격이 착하다 못해 바보같이 보일 정도라 인기가 많았으며 이런 탓에 세상을 약간 삐뚤어지게 보는 타입인 지혜에게 있어서 상극에 가까웠다.
"민경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많이 힘들었지? 대학은 다시 나오기 한거야? 벌써 나와도 괜찮겠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질문공세하는 유나에게 지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잠깐 들렸어요.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네요?"
"당연하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모자랑 마스크 때문에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유나의 맑은 눈은 지금부터 나쁜짓을 하려는 지혜의 양심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지혜는 대답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오늘은 정말 잠깐 들린거라 다음에 다시 제대로 인사드릴게요"
"어? 그러지말고 이야기나 좀 더 하자 내가 도와줄 수 있는건 도와줄테니까"
"민경이가 기다려서요 이 음료 주러가야해요. 다음에 뵈요!"
"아! 지혜야!"
음료를 슬쩍 들어보이며 대충 둘러댄 지혜는 후다닥 건물 안으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도망가는 지혜의 뒷모습을 보며 유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은걸까? 앗"
지혜가 방금까지 앉아있던 벤치를 보니 쓰레기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지혜가 미처 치우지 못하고 간 것이였다.
"나중에 이야기 해야겠네.. 응?"
당장은 바쁜 것 같으니 지혜와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 생각하며 유나는 그녀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빈 병이 눈에 들어왔다.
"푸룬주스? 지혜 변비 있는건가? 이거 먹으면 배 엄청 아프던데 대단하네"
'방금 음료 두잔 들고있지 않았나? 이거 먹고 바로 또 뭘 마시면 큰일날텐데'
유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곤 쓰레기들을 마저 치웠다. 자리가 깨끗해진걸 확인한 그녀는 그제서야 벤치를 떠났다.
"안녕 민경아"
"왔어? 갑자기 대학엔 무슨일이야"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경은 보고있던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한채 지혜에게 말했다. 그 덕에 지혜는 떨리는 손을 보이지 않은채 그녀 옆에 자연스럽게 음료를 놔둘 수 있었다.
"내가 못 올 곳 왔어? 어차피 나도 다니는 곳인데 언제든 올 수 있지"
"그건 그렇지, 아 고마워"
지혜가 올려둔 음료를 확인한 민경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곤 바로 음료를 입에 물었다.
"음.. 으엑 이게 뭐야?"
"어? 아이스티에 샷 추가 한건데 이상해?"
"아~ 아샷추? 난 별로던데 넌 이게 맛있어?"
"나도 안먹어봐서 산건데 많이 별로네. 다음엔 안먹어야겠어"
음료가 상당히 맛이 없는 모양인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도 민경은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지혜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음료를 많이 마시길 기다렸다.
"그래서 진짜 왜 온거야?"
"아~ 아니 생각해보니까 니 제안도 괜찮겠다 싶어서. 휴학계낼까 했지"
"정말? 휴학하려고? 갑자기?"
지혜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응 1년만 하려고. 나를 좀 돌아볼 시간이 필요해"
"잘 생각했어 좀 아쉽긴하지만.. 언제든지 보면 되니까"
물론 거짓말이였다. 대학을 오기 힘든 심리상태인 것도 있지만 민지와 민경을 망가뜨리려면 대학 다니는 시간도 아까웠기에 내린 결정이였다.
"너도 조심해. 괜히 또 최민지랑 싸우지말고"
"최민지? 아~ 나 그런 얘랑은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하는거 알잖아. 당연하지"
민경은 민지를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최근 무용과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최민지 험담을 들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아니 최민지 미친년 요즘 존나 뿡뿡거린다니까? 뿡뿡이 인줄 알았어 진짜'
"푸흐흣!"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푸흡!"
자신이 이런걸로 웃으면 안되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험담을 떠올릴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민경은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지혜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혜야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먼저 일어나도 될까?"
"아 그럼 당연하지. 얼른가 나는 이거 다 마시면 일어날게"
"미안해 나중에 날 잡고 제대로 이야기하자?"
남은 음료를 들고 일어난 민경은 지혜에게 씨익 웃어주곤 휴게실을 떠났다. 저 남은 음료마저 다 마셔주길 바라며 지혜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을 나갔다. 어서 빨리 대학을 벗어나고 싶었다.
"언니 요즘 바빠?"
"응?"
지혜가 민경과 이야기하던 그 시각 민지는 친한 언니이자 선배인 3학년 박서희와 이야기하는 중이였다. 같은 배구 동아리 소속인 서희와 민지는 동아리 활동과 별개로 만남을 자주 가졌다.
"바쁘진 않아. 왜?"
"나랑 이야기하면서 계속 휴대폰 보길래 약속있나 했지"
"아~ 이거?"
서희는 민지의 지적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 나 최근 남자 소개받아서"
"정말? 누구야? 사진있어?"
"볼래? 귀염상이야"
"볼래볼래 와~"
서희가 보인 사진엔 귀여운 남자가 찍혀있었다. 동그란 안경에 마치 다람쥐가 연상되는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귀엽지?"
"이런 사람은 어디서 만났어? 언니랑 진짜 잘 어울려"
"그래? 후후"
부끄러운듯 미소 지어보이는 서희에게 민지는 말을 이었다.
"어쩐지~ 언니 정도 되는 사람이 왜 남친 안만나지? 했는데 이런 사람이 취향이였구나?"
"취, 취향은 아니고 사람이 좋아서 그런거야!"
"에이~"
175의 큰 키와 차가운 눈매를 가진 박서희는 운동신경이 좋은편이였고 꾸준한 운동을 통한 자기관리를 한 덕에 일자 복근을 가진 탄탄한 체형이였다.
민지 입장에선 이런 미인이 여태까지 남자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동성애자인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언니는 외모도 예쁘지 몸도 좋지 게다가 가슴도 큰데 왜 남자친구 안만나지 했다니까?"
"가슴 이야기는 하지마 알잖아?"
"아, 미안"
게다가 예쁜 외모와 탄탄한 체형에 더해 G컵이라는 큰 가슴을 가진 덕에 서희를 소개시켜달라는 남자들이 수두룩 했다. 민지가 그때마다 서희에게 이야기 해봤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건 서희의 냉소섞인 한마디였다.
"그런 놈들은 다 짐승이야 짐승. 나는 연애 관심 없어"
큰 가슴이 콤플렉스였던 서희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관심 보이는 남자들은 다 가슴 보고 발정난 원숭이라는 느낌이였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겼다니 민지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되게 작아보인다"
"응 맞아 키가 167? 이였나 그래"
"엥? 언니보다 작네? 언니 진짜 그런 취향이였어?"
"그런 취향 아니라니까! 그냥 잘 맞아서 그런거라구!"
얼굴이 새빨개진 서희를 보며 민지는 알았어 알았어~ 하곤 짓궂게 웃었다. 정말이지 놀릴 맛 있는 언니였다.
"너야말로 오늘은 약속 없어? 요새 맨날 바쁘다 했잖아"
"아~ 그거? 괜찮아 지금 잠깐 쉬는 중이라"
소민과 싸우고 난 뒤로 그녀에게 스트레스였던 갑작스럽게 나오는 방귀도 없어진 덕에 간만에 편안한 하루였다. 소민과 싸운 문제는 이따 화해하면 그만이였다.
"그보다 언니 나랑 옷 사러가자. 나 지금 입고있는 옷 당장이라도 버려버릴려고"
"갑자기? 지금 옷 괜찮은데 왜?"
"그건 언니 입장이라 그래. 시간 있지?"
"어.. 그래 가자"
민지는 서희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지혜와 마주칠 뻔 했지만 지혜에겐 다행스럽게도 아슬아슬하게 만나지 않고 대학에서 나올 수 있었다.
-꾸르르르륵...
"아윽?!"
민지와 지혜가 대학을 떠나고 30분 정도 지나고, 민경은 갑작스러운 복통에 몸을 웅크렸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꾸르륵 꿔드드득
"흐윽?!"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 신호는 명백한 급똥이였다. 갑자기 배가 미친듯이 아파오자 민경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끊임없이 배를 자극하는 움직이기 힘든 고통에 민경은 패닉에 빠졌다. 누가 보면 그냥 화장실로 달려가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민경에겐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집에 가야해..!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절대 집 외의 화장실에서 큰 것을 보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 그녀가 당했던 일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 탓이였다.
kowai
2024-09-15 14:54:52 +0000 UTC브육
2024-09-15 05:17:15 +0000 UTC